신민에게 돈을 빌린 왕
1694년 7월 27일, 런던에서 왕실 특허장 하나가 상품을 하나도 팔지 않는 회사를 세웠다. 그 회사가 하는 일은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다.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윌리엄 3세는 전례 없는 차입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겨우 11일 만에 민간에서 모였다.
11일 만에 모인 대출금
1690년 비치헤드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에 패한 뒤,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는 신용을 잃은 상태였다. 국가는 런던의 유일한 은행가인 금세공업자들에게서 연 20~30%의 이자로 돈을 빌리고 있었는데, 프랑스와의 전쟁은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재무부는 해군을 재건할 새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런 이자율로는 왕실에 오래 돈을 빌려줄 이가 많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상인 윌리엄 패터슨은 전례 없는 구상을 내놓았다. 민간이 정부에 120만 파운드를 직접 빌려주되, 이자는 금세공업자들보다 훨씬 낮은 연 8%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인수자들은 「잉글랜드은행 총재 및 회사」라는 법인으로 조직되고,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얻는다. 이 금액은 온갖 계층 출신의 1,268명이 참여해 단 11일 만에 모였고, 왕실 특허장은 1694년 7월 27일에 봉인되었다. 존 후블런 경이 초대 총재를 맡았다.
패터슨 자신은 동료들과의 불화로 1695년 일찌감치 이사회를 떠났다. 그 뒤 그는 훨씬 더 위험한 사업에 힘을 쏟았다. 파나마 지협에 스코틀랜드 무역 거점을 세우려 한 「다리엔 계획」이었다. 이 사업은 참사로 끝나 그의 아내와 자식의 목숨을 앗아갔고 스코틀랜드 전체를 파산 직전으로 몰았다. 자기 세기에서 가장 안전한 대출을 고안한 사람이, 제 손으로 가장 무모한 투자에 서명한 셈이었다.
몰수보다 차입이 더 남는 장사였다
이 사건은 조용한 전환점을 이룬다.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자의적으로 세금을 매기는 대신, 국가는 의회의 감시 아래 제 신민에게서 돈을 빌리고 이를 성실히 갚는 길을 택했다. 공공 신용을 발명한 것은 은행 그 자체가 아니다. 해마다 이어진 상환의 규칙성이야말로 일회성 전쟁 차입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영구적 국채로 바꾸어 놓았다. 1694년의 잉글랜드은행은 아직 사기업으로, 재무부의 계좌 하나를 관리했을 뿐이다. 최종 대부자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남아 있었고, 국유화는 1946년에야 이루어졌다.
이 교훈은 17세기를 넘어선다. 국가가 싼값에 돈을 빌릴 수 있는지는 그 약속 자체가 아니라, 그 약속을 짊어진 기관의 신뢰도에 달려 있다. 오늘날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나 국가 신용등급을 둘러싼 논쟁도 다른 모습을 한 같은 질문이다. 대출자가 언젠가 상환받으리라는 것을, 정확히 누가 보장하는가?
채권자에게 갚는 군주는 그들을 외면하는 군주보다 결국 더 싸게 돈을 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