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청산
1944년 7월 22일, 브레턴우즈에 모인 44개 대표단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을 낳은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그 안에는 세 줄짜리 제5결의가 끼워져 있었다. 국제결제은행을 「가능한 한 빨리」 청산하라는 내용이었다. 82년이 지난 지금도 바젤의 그 은행은 문을 닫지 않았다.
세 줄로 내려진 사형선고
국제결제은행은 1930년 1월 20일 헤이그 회의에서 채택된 영 안(Young Plan)에서 나왔다. 같은 날 여섯 정부와 스위스가 맺은 협약이 그것을 바젤의 첸트랄반슈트라세, 옛 사보이위니베르 호텔에 자리 잡게 했다. 임무는 하나였다. 독일이 갚아야 할 배상 연부금을 거두고 관리하고 나누는 일이다. 은행은 1930년 5월 17일 문을 열었다. 두 해 뒤 로잔 협정이 배상을 취소하자 이 기관은 할 일을 잃었다. 그리하여 뒷날 자신의 본업이 될 것, 곧 중앙은행 사이의 기술적 협력으로 방향을 돌렸다.
전쟁은 이 은행을 견디기 어려운 자리에 놓았다. 이사회에 서로 싸우는 나라들의 중앙은행이 함께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 3월, 독일군이 프라하에 들어간 지 며칠 뒤, 은행은 체코슬로바키아 국립은행의 지시를 이행했다. 영란은행의 국제결제은행 계좌에 있던 그 나라 금 준비의 일부를 라이히스방크 계좌로 옮기는 지시였고, 그 지시는 강압 아래 내려진 것이었다. 전쟁 동안 은행은 1930년에 사들인 독일 채권의 이자를 금으로 받았다. 라이히스방크에서 받은 3.7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약탈된 금이었고, 1948년에 반환된다.
이 선고는 보기보다 약했다.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권고였고, 제3위원회가 「적성 자산, 약탈 재산 및 관련 사항」이라는 항목 아래 채택한 것이었다. 최종의정서는 어떤 서명국도 구속하지 않았으며, 청산 대상이 된 은행의 주주는 다름 아닌 중앙은행들이었다.
제도를 존속시키는 것
유럽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이미 1946년 12월에 바젤 회합을 다시 열었다. 1947년 11월에는 베네룩스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첫 다자 청산 협정의 기술적 대리인 역할을 국제결제은행에 맡겼다. 1948년 초, 청산 결의는 조용히 치워졌다. 1950년 9월에는 열여덟 나라가 같은 은행에 유럽결제동맹을 맡겼다. 기금과 세계은행이 쓸모없게 만들 것이라던 기관을, 유럽의 재무당국들이 도리어 필요로 했던 셈이다.
국제기구는 표결로 죽지 않는다. 그것이 할 줄 아는 일을 아무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죽는다. 국제결제은행은 무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쓸모를 얻었다. 그 뒤의 일이 이를 확인해 준다. 1974년 헤르슈타트의 파산은 G10 총재들로 하여금 바젤에 바젤은행감독위원회를 세우게 했고, 이 위원회는 1988년 첫 자기자본 협약을, 이어 바젤 II와 바젤 III를 내놓는다. 어떤 조약도 그것에 구속력을 주지 않는다.
브레턴우즈 회의가 없애자고 한 유일한 기관은, 그 자리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유일한 기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