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리에 맺어진 조약
1860년 1월 23일, 프랑스와 영국은 극비리에 협상한 통상조약에 서명했다. 나폴레옹 3세는 수십 년 묵은 수입 금지를 풀면서 제조업자에게도 의회에도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행정부가 결정한 관세 혁명
세기 초부터 프랑스는 금지 조치로 자국 산업을 보호했다. 모직물과 면직물을 비롯한 영국 제품 다수가 아예 들어올 수 없었다. 1856년의 자유화 시도는 의회의 거부에 부딪혔다. 1859년 말 나폴레옹 3세는 그 장애물을 우회했다. 조약은 행정부의 권한에 속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미셸 슈발리에와 영국 하원의원 리처드 콥든이 이끈 협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황제를 제외하면 프랑스에서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조약은 1860년 1월 23일 서명되었다. 프랑스는 그때까지 금지되었던 영국 제품 44개 범주를 받아들이고, 관세를 가격의 30%로 제한했으며 1864년 10월 1일부터는 25%로 낮추기로 했다. 영국은 비단 직물을 포함한 41개 품목의 관세를 없애거나 낮추고, 포도주와 증류주에 붙는 관세도 단계적으로 내렸다. 조약의 기한은 10년이었다.
결정적인 장치는 제19조, 무조건적 최혜국 조항이다. 나중에 제3국에 부여하는 관세상의 이익은 다른 서명국에도 똑같이 부여해야 한다. 그 뒤 프랑스가 맺는 협정마다 관세 인하가 모든 상대국으로 번졌고, 두 나라 사이의 조약은 차츰 하나의 망이 되었다. 영국은 1860년대에 이런 조약을 여덟 건 체결하게 된다.
무너지지 않고 문을 열다
보호무역론자들은 제조업자의 몰락을 예고했다. 숫자는 다르게 말한다. 프랑스 관세의 평균 세율은 1859년 약 11%에서 1861년 5%로 내려갔다. 코냑 수출은 1860년 15만 헥토리터에서 1866년 42만 1천 헥토리터로 뛰었다. 면직물, 모직물, 견직물처럼 같은 업종 안에서 오가는 교역은 프랑스 무역의 약 14%(1859~1860년)에서 38%(1872년)로 커졌다. 프랑스는 더 많이 수입하면서도 해외에 덜 팔지 않았다.
그 뒤의 일은 개방이 정치적 선택이며 따라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보호주의 압력은 1878년부터 나타났고, 프랑스는 1892년 메린 관세로 이 체제를 끝냈다. 그사이 이 조약은 오래가는 본보기를 남겼다. 양자 협정, 그것을 증식시키는 조항, 의회를 기다리지 않고 나라를 구속하는 행정부. 최혜국 조항은 지금도 세계 무역 규칙의 중심에 있다. 두 나라가 협상한 개방은 어디까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자유무역은 교리보다 서명에 더 기대고 있으며, 서명은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