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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떨게 한 은행

1931 위기와 파산 읽기 3분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이 장부에 구멍이 났음을 시인했다. 몇 주 만에 소식은 국경을 넘고 대서양을 건넜다. 작은 나라의 위기가 유럽의 위기가 된 것이다.

사실

강제된 합병, 구멍, 그리고 인출 쇄도

1855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후원 아래 빈에서 세워진 크레디트안슈탈트는 1931년 당시 오스트리아 은행권 자산의 27%, 곧 국내총생산의 16%에 해당하는 규모를 차지했다. 1929년에는 정부의 압력으로 부실 은행인 보덴크레디트안슈탈트를 흡수했는데, 이 은행의 순자산은 마이너스였다. 약한 은행 하나를 구하려다 가장 튼튼한 은행이 약해진 셈이다.

당국은 1931년 5월 8일 문제의 크기를 파악했고 11일에 공표했다. 국가와 중앙은행, 로스차일드가 구제 비용을 나누어 졌고, 정부는 은행의 채무를 보증했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다. 예금자들, 특히 외국인 예금자들이 자금을 대거 빼 갔다. 보증 자체도 불안을 키웠다. 작은 국가의 연간 예산 가운데 상당한 몫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작동 원리는 뱅크런이다. 은행은 예금 전부를 금고에 두지 않고 대출로 돌린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인출하리라 판단하는 순간 모두가 먼저 인출하는 편이 이로워지고, 두려움만으로 그 두려움의 대상인 파산이 일어난다. 빈에서는 신뢰가 증발하는 속도를 보증이 따라잡지 못했다.

유럽을 떨게 한 은행
그것이 드러내는 것

전염에는 국경이 없다

크레디트안슈탈트는 중부 유럽 전역에 채권자와 투자 지분을 두고 있었다. 자본 이탈은 독일로 번져, 독일 은행들은 이미 6월에 예금을 잃었고 다름슈태터 운트 나치오날방크는 1931년 7월에 무너졌다. 9월에는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앞선 고리에 대한 신뢰가 깨졌기에 고리마다 차례로 끊어졌다.

이 사건은 시스템 위험의 교과서적 사례다. 한 기관이 너무 커서 너무 작은 국가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통화가 금에 묶여 있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은행의 규모, 최종 대부자의 역할, 예금자 보호 제도를 둘러싼 오늘의 논쟁이 여기에 닿아 있다. 현대의 제도는 예금 보호를 위기 한복판이 아니라 미리 마련해 둔다. 공황 한가운데서 내놓은 보증은 거의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

신뢰는 쌓는 데 여러 해가 걸리고 떠나는 데 며칠이면 족하며, 늦게 나온 어떤 보증도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