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달러를 빌려준 교수
1976년,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방글라데시 조브라 마을의 장인 마흔두 명에게 아무런 담보도 없이 자기 주머니에서 27달러를 빌려준다. 이 한 줌의 지폐가 소액대출과 그라민 은행을 낳게 된다.
빌려준 사람만 이롭던 생업
치타공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였던 무함마드 유누스는 1974년 방글라데시를 덮친 기근을 지켜본다.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모델은 캠퍼스를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곤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년 뒤 그는 인근 조브라 마을을 찾아, 대나무 걸상을 만드는 장인들을 만난다. 이들은 원자재를 사려고 중개상에게 돈을 빌리고, 그 중개상은 다 만든 걸상을 미리 정한 값에 되사 간다. 둘 사이의 차액은 빚을 겨우 메울 뿐이어서, 하루 이익은 몇 센트에 그쳤다.
유누스는 이렇게 붙잡힌 장인 마흔두 명의 명단을 작성한다. 이들의 빚을 모두 합쳐도 하찮은 액수였다: 856타카, 27달러에 해당한다. 그는 담보도 서류도 없이, 오직 갚겠다는 약속만 믿고 자기 주머니에서 이 돈을 빌려준다. 중개상의 선불에서 풀려난 장인들은 원하는 곳에 팔아 자기 몫을 챙겼고, 모두가 빚을 갚았다.
유누스가 여기서 끌어낸 생각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신용은 이미 담보로 잡힐 재산을 가진 이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것. 대출에는 담보가 없지만, 혼자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다: 작은 무리가 서로 돕고 서로를 지켜보며, 이웃의 압력이 은행의 보증을 대신한다.
담보를 대신한 신뢰
조브라의 실험은 하나의 사업이 되었다가 은행이 된다: 1983년 10월 2일, 방글라데시 정부의 시행령이 이 사업을 독립 기관, 곧 「마을의 은행」이라는 뜻의 그라민 은행으로 바꾼다. 2006년 기준 이 은행은 700만 명이 넘는 대출자를 두었고, 그 95%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상환율은 95%를 웃돌았다. 같은 해 노벨위원회는 「밑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려는 노력」을 이유로 유누스와 그의 은행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한다.
이 모델은 세계로 퍼졌지만, 그 안전장치까지 함께 옮겨 가지는 않았다. 금리와 추심 방식에 덜 신중한 영리 사업자들이 이를 베끼면서, 2010년 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는 당국이 서둘러 규제에 나서야 할 만큼 심각한 과다 부채 사태가 빚어졌다. 약탈적 대금업자로부터 채무자를 해방하려고 태어난 발상도, 그것을 떠받치던 신뢰에서 떨어져 나가면 같은 결과를 되풀이할 수 있다: 소액대출은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빼앗을 것 없이 빌려준다는 것은, 신뢰가 담보보다 값지다는 데 거는 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