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이 아니었던 오리 사냥
1910년 11월, 여섯 사람이 뉴욕을 조용히 떠나 조지아 앞바다의 섬으로 향했다. 공식 명분은 오리 사냥이었다. 이들은 미국 중앙은행의 설계도를 들고 돌아왔고, 의회는 3년 뒤 이를 고쳐 채택했다.
몰래 쓴 중앙은행 설계도
미국에는 1830년대 이후 중앙은행이 없었고, 1907년 10월의 공황은 그 부재의 대가를 보여 주었다. 최종 대부자가 없어 은행가 J. P. 모건이 직접 금융인들을 불러 모아 파산을 막아야 했다. 1908년 의회는 로드아일랜드 상원의원 넬슨 올드리치가 위원장을 맡는 국가통화위원회를 세워 개혁안을 마련하게 했다.
1910년 11월, 올드리치는 다섯 사람을 데리고 조지아 앞바다의 지킬 섬으로 갔다. 위원회 협력자인 A. 피아트 앤드루와 아서 셸턴, 은행가 헨리 데이비슨과 프랭크 밴더리프, 독일계 금융인 폴 워버그였다. 이들은 사냥 모임을 구실로 뉴저지의 한 종착역에서 한 명씩 올드리치의 전용 객차에 올랐고, 직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만 불렀다. 한 주가 넘도록 그들은 밤늦게까지 작업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리저브 어소시에이션 오브 아메리카」 구상이었다. 열다섯 개 지점을 둔 단일 은행이 회원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보관하고, 화폐를 발행하고, 상업어음을 할인하고, 수표 청산을 맡는다는 계획이다. 1911년 1월 국가준비협회라는 이름으로 위원회에 제출되었으나, 이 안은 그대로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다. 월가의 손길을 보는 시선이 많았기 때문이다.
1912년 민주당이 승리한 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구상의 기술적 뼈대는 살리되 통제의 주체를 바꾸었다. 단일 은행이 아니라 열두 개의 지역 은행을 두고, 그 위에 워싱턴에서 임명하는 이사회를 얹었다. 상원은 1913년 12월 23일 43 대 25로 연방준비법을 통과시켰고, 윌슨은 같은 날 오후 6시에 서명했다.
타협에서 태어난 제도
이 일화는 중앙은행이 기술적 장치이기 전에 정치적 대상임을 일깨운다. 지킬 섬의 여섯 사람은 지급준비, 할인, 청산이라는 기계 장치를 내놓았지만, 최종 형태는 집중된 권력에 대한 지극히 미국적인 불신에 답해야 했다. 그 권력이 월가에 있든 워싱턴에 있든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역적이면서 연방적이고, 이사회로는 공적이며 회원 은행의 자본으로는 사적인 혼합 체제가 나왔다.
회의를 둘러싼 비밀은 수십 년 동안 의혹을 키웠고, 연준은 지금도 미국 공적 생활에서 가장 많이 논쟁되는 기관의 하나로 남아 있다. 거기서 나오는 질문은 오늘의 논쟁에도 이어진다. 통화를 정치 권력의 압력에서 떼어 놓으면서 민주적 통제에서는 떼어 놓지 않으려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중앙은행은 흔히 문을 닫고 설계되지만, 그 정당성은 공개된 자리에서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