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달력

영국을 금본위로 이끈 과학자

1717 화폐와 금속 읽기 3분

1717년 9월 21일, 왕립조폐국장 아이작 뉴턴은 재무위원들에게 금과 은의 가치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은을 왕국 안에 붙잡아 두려 했으나, 의도와 달리 영국을 금본위제로 가는 길에 올려놓았다.

사실

기니 한 닢에 붙은 6펜스

여러 해 동안 조폐국에는 금이 밀려들었고, 은화는 녹여지거나 인도로 실려 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1717년 8월 12일, 재무위원들은 뉴턴에게 그 원인을 밝히라고 요청했다. 영국에서 기니 금화는 은화 21실링 6펜스로 통용되었는데, 이는 금을 같은 무게 은의 15.5배 이상으로 평가하는 셈이었다. 유럽 대륙에서 그 비율은 14.8에서 15 사이였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9나 10에 그쳤다.

상인에게 차익거래는 단순했다. 외국에 진 빚을 영국 은으로 갚으면 금으로 갚을 때보다 4% 가까이 이득이었다. 그리하여 은은 수출되었고, 외국인들은 금을 런던으로 보냈다. 뉴턴은 기니에서 10~12펜스를 깎자고 제안하면서도, 당장은 6펜스에 그치라고 권했다. 정부는 이를 따랐다. 1717년 12월, 국왕 포고로 기니는 21실링으로 고정되었다.

뉴턴은 선택지를 스스로 이렇게 제시했다. 금값을 정부가 낮출 것인가, 아니면 「은화가 모자라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내버려 둘 것인가. 그의 개혁에서 나온 가격, 곧 표준 금 1온스당 3파운드 17실링 10펜스 반은 나폴레옹 전쟁기의 중단을 제외하면 20세기 초까지 조폐국 가격으로 유지되었다.

1717년, 영국을 금본위로 이끈 과학자
그것이 드러내는 것

소심한 조정에서 태어난 본위제

조정은 충분하지 못했다. 21실링에서도 금은 유럽 시세에 비해 여전히 조금 과대평가되어 있었고, 은은 계속 나라를 떠났다. 은화가 귀해지자 지불은 점점 금으로 이루어졌다. 왕국은 18세기를 사실상의 금본위제 아래에서 보냈고, 법이 이를 공인한 것은 181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어지는 세기에 세계 금융을 조직한 체제는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채 남은 공정 가격에서 나온 것이다.

이 일화는 모든 복본위제의 한계를 보여 준다. 시장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금속의 비율을 법령으로 고정한다는 한계다. 법정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이가 운송비를 넘어서면, 과소평가된 금속은 빠져나간다. 세계 교역의 규모로 적용된 그레셤 법칙이다. 같은 메커니즘은 국가가 시장에 맞서 환율을 붙들 때마다 되풀이된다. 유통될 화폐를 고르는 것은 법령이 아니라 차익거래자들이다.

금본위제는 이론이 아니라, 아무도 감히 깎지 못한 6펜스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