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 없이 열린 운하
1914년 8월 15일, 파나마 운하가 상업 항행에 문을 연다. 화물선 앤콘호가 국가 원수도 축하 행사도 없이 첫 공식 통과를 마친다. 일곱 주 앞서 일어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이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개통을 위해 준비하던 국제 기념식은 그대로 취소되었다.
십 년의 공사, 하루의 축하도 없이
1904년부터 미국은 프랑스가 십오 년 앞서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큰 손실을 입고 포기한 사업을 넘겨받았다. 미국의 공사는 1904년부터 1913년 사이 최대 5만 6천 명을 고용했고, 이 기간 약 5,600명의 사망이 기록되었다. 역사가들은 프랑스 쪽의 체계적인 기록이 없었던 탓에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총비용은 약 3억 7,500만 달러에 달했으며, 그중 1,000만 달러는 파나마에, 4,000만 달러는 포기한 자산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에 지급되었다.
1914년 8월 15일, 화물선 앤콘호는 대서양 쪽 크리스토발을 떠나 약 아홉 시간의 항해 끝에 태평양 쪽 발보아에 도착한다. 배에는 왕족도 귀빈도 타지 않았다. 워싱턴이 몇 달째 준비하며 외국 함대의 참석까지 예고했던 국제 기념식은 유럽이 전쟁에 들어서자마자 취소되었다. 당시 한 증언자는 그날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사람이라면 운하가 예전부터 늘 열려 있었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적었다.
기술적으로 이 운하는 해수면 높이에서 단순히 물길을 파낸 것이 아니다. 세 쌍의 갑문이 각 선박을 26미터 들어 올려 인공 호수인 가툰호로 옮긴 뒤, 반대편에서 다시 내려놓는다. 단순한 수로가 아니라 이 체계를 짓는 데 십 년이 걸렸고, 1914년 8월 15일 그것은 첫 시도에서 제대로 작동했다.
세계의 값을 바꾼 지름길
개통식이 화려함에서 잃은 것을, 이 운하는 그 영향력으로 벌충한다. 케이프 혼을 돌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던 1만 3천 해리가 넘는 항로가 운하를 통하면 5천 해리를 조금 넘는 거리로 줄어든다. 어떤 배도 더 빨리 달리지 않았는데 매 항해마다 거의 8천 해리가 절약된 셈이다. 세계 화물은 어떤 무역 협상도 내줄 수 없던 것을 단숨에 얻었다. 상업 지도에서 단번에 잘려 나간 시간과 거리였다.
이 일화는 경제사가 자주 되풀이하는 사실 하나를 말해준다. 사회기반시설은 개통을 둘러싼 소음이 있든 없든 그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축하가 잊힌 뒤에도 파나마 운하는 세계 무역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예의주시되는 길목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자연조건에 워낙 민감해서 강수량의 아주 작은 변화도 곧바로 화물 운임에 반영된다.
국가 원수가 리본을 자르지 않아도, 하나의 길은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