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돈이
마른 화요일
1907년 10월 22일, 맨해튼의 대형 금융기관 니커보커 신탁회사는 약 800만 달러에 가까운 예금이 빠져나간 끝에 지급을 정지한다. 당시 어떤 공적 기관도 긴급히 화폐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 일을 한 것은 민간 은행가였다.
은행이 아닌 곳에 몰린 인출 행렬
발단은 1907년 10월 16일의 실패한 도박이었다. 오거스터스 하인츠와 찰스 모스가 유나이티드 코퍼 주식을 매점하려다 실패했다. 두 투기자는 은행을 경영하고 있었고, 소문은 그들의 은행으로, 이어 그들과 연결되었다고 여겨진 모든 기관으로 번졌다. 뉴욕 어음교환소는 회원 은행들 안에서 불길을 잡았다. 그러나 회원이 아니면서 예금을 받던 신탁회사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10월 21일 니커보커 이사회는 모스와 얽힌 사장 찰스 바니를 물러나게 했고, 어음교환소는 자원이 회원 몫이라며 구제를 거절했다. 벤저민 스트롱이 이끄는 팀이 신탁회사의 지급능력을 따져 볼 시간이 없었던 J.P. 모건 역시 대출을 거절했다. 22일 니커보커는 문을 닫는다. 같은 날 하루짜리 자금 금리는 9.5%에서 70%로 뛰었고, 이틀 뒤에는 100%에 이르렀다.
신탁회사들은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던 취약성을 드러냈다. 예금의 약 5%만 현금으로 쥐고 있었고, 국법은행은 약 25%였다. 1907년 8월 22일부터 12월 19일까지 뉴욕 신탁회사 예금의 36% 이상이 빠져나간 반면, 국법은행 예금은 늘었다. 가장 거센 인출 행렬은 트러스트 컴퍼니 오브 아메리카를 덮쳤다.
모건은 대형 기관들에서 현금을 모아 뉴욕증권거래소의 대출 창구로 보내, 중개인들이 계속 대출하고 시장이 열려 있도록 했다. 10월 26일 어음교환소는 대출증서 발행 체계를 꾸렸고, 은행들은 예금의 현금 전환을 제한했다.
존재하지 않았던 최종 대부자
1907년 공황은 미국이 풀지 못한 물음을 던진다. 모두가 같은 날 돈을 찾으려 할 때 누가 유동성을 만드는가? 중앙은행이 없었기에 민간 은행가가 어음교환소와 함께 답을 즉흥으로 내놓았다. 대출증서는 훗날 연방준비제도의 재할인 창구를 축소판으로 예고한다. 대가는 실제로 컸다. 1908년 산업 생산은 17%, 실질 국민생산은 12% 줄었다.
의회는 교훈을 얻었다. 1913년 12월 연방준비법이 서명되었고, 12개 연방준비은행은 약 1년 뒤 문을 열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낡지 않았다. 기관은 지급능력이 있어도 유동성이 모자라 쓰러질 수 있다. 위기는 준비금이 얇고 안전망이 닿지 않는 곳에서 터진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역사가들은 니커보커의 몰락을 2008년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에 견주기도 한다.
모두가 같은 날 돈을 원하면 지급능력만으로는 모자란다. 빌려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