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이 시차이기를
그친 날
1866년 7월 27일, 대양 밑바닥에 놓인 케이블이 아일랜드와 뉴펀들랜드를 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데 일주일이 걸리던 소식이 이제 그날 안에 닿았다. 그 구리선이 없앤 것은 거리가 아니었다. 가격의 격차였다.
가장 먼저 오간 전문 가운데 면화 시세가 있었다
1857년 이래 다섯 번의 시도와 네 번의 실패, 대양 한가운데에서의 절단, 그리고 허황된 꿈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1866년 7월 27일, 미국 금융가 사이러스 필드의 지휘 아래 케이블은 마침내 뉴펀들랜드의 어촌 하츠콘텐트 해안으로 끌어올려졌다. 아일랜드 밸런시아섬에서 약 1,686해리 떨어진 곳이었다. 가장 먼저 오간 전문 가운데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축전,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승리, 그리고 뉴욕과 리버풀 양쪽에서 매겨진 면화 시세가 있었다.
마지막 항목은 결코 곁가지가 아니다. 그전까지 리버풀의 가격은 배의 속도에 실려 일주일 남짓 늦게 뉴욕에 닿았다. 그래서 미국 상인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유럽의 수요를 근거로 면화를 사들였고, 값비싸고 화재 위험까지 큰 창고 보관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케이블의 요금은 만만치 않아 스무 낱말짜리 전문 한 통에 최소 20파운드였다. 면화 중개인에게는 그만한 값을 하는 정보였다.
효과는 측정된다.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슈타인벤더는 양쪽 시세를 견주어, 뉴욕과 리버풀의 평균 가격 차이가 케이블 이전 면화 1파운드당 2.56펜스에서 이후 1.65펜스로, 3분의 1 넘게 줄었으며 무엇보다 급격한 요동에 훨씬 덜 시달리게 되었음을 보였다.
정보는 하나의 운송 비용이다
정보를 더 잘 갖추게 되자 뉴욕의 수출업자들은 눈을 감고 선적하기를 그쳤고, 기억 속의 수요가 아니라 실제 수요에 맞추어 물량을 조절했다. 면화의 일일 수출량은 평균 37% 늘었고, 그 변동 폭은 그보다 더 커졌다. 조절이 이제 날마다 이루어졌다는 표시다. 슈타인벤더는 대서양 면화 무역의 효율 개선을 연간 거래액의 8%로 추산한다. 7%의 종가세 관세를 없앤 것과 맞먹는 크기다. 구리선 한 가닥이, 통상 조약이라면 몇 해를 협상했을 것을 단숨에 이루어 낸 셈이다.
파장은 면화에 그치지 않는다. 대양 양쪽에 상장되어 있던 뉴욕 앤드 이리 철도의 주식은 가격 차이가 대략 5~10%에서 2~3%로 내려앉았고, 런던에서 거래되던 미국 국채도 같은 방식으로 수렴했다. 다섯 해 뒤에는 뉴욕 면화 거래소와 그 선물 계약이 태어난다.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일물일가의 법칙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기반 시설이 낳은 결과다. 전신에서 광섬유로, 그리고 시카고와 뉴욕을 잇는 마이크로파 회선으로, 정보가 빨라질 때마다 격차는 닫히고 시차로 먹고살던 이들의 지대는 증발한다.
모든 차익 지대는 정보의 느림에 거는 내기다.